정희민 개인전 : If We Ever Meet Again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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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6.25 - 2020.08.14페이지 정보
Place. 021갤러리본문
정희민 개인전 : If We Ever Meet Again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오늘날의 '만남'은 여러 형태를 포괄한다. 그것은 물리적인 접촉을 의미하기도 하고 하나의 아이디어로만 존재하기도 하며 계획에 의한 것일 수도, 때론 우연적인 사건일 수도 있다. 만남은 반복될 수도 일회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일상을 매개하는 여러 조건들이 물리적 실체로 존재하는 대상을 전제하지 않으며 점점 분석과
예측을 위한 데이터가 되는 세계에서 '만남'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동일한 정서적 가치를 가질까? 어쩌면 더 이상 복수(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의 동작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언어 형식)는 만남의 필요 조건이 아닌지 모른다. If We Ever Meet Again은 만남의 여러 새로운 조건들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전시로, 대상이 부재하는 만남의 경험이 축적되어 만들어내는 시적이면서도 기만적인 감각을 물질로서 비유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정희민 개인전: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보이지 않는 시간을 이해하는 것
|홍이지 (Hong Leeji, 전시기획자)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If We Ever Meet Again>은 ‘만남’이라는 일상적인 사건 혹은 행위가
새로운 정서적 가치와 함의를 가지게 된 일련의 경험을 통해 작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조건에서 과연 정서적인 감각이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정희민은 이번 전
시를 통해 더 이상 ‘만남’이라는 조건이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전시라는 매체에서 항상
부재했던 작가의 몸과 존재, 그리고 과거의 시간이 어떠한 형태로 남겨져 있는지에 대해 미
지의 만남과 경험에서 촉발된 새로운 감각의 상태를 물질로써 비유해 보고자 한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단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 시간 동안 멋진 그림을
그리려면 적어도 네 시간 동안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데이빗 린치의 말처럼, 회화에 있어
과거란, 작가가 작품을 그리는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전시장에서 마주하는
그림은 완결된 상태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시간을 상상해보는
것은 통합적으로 그림을 이해해보려는 감상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안에는 붓질의 형
태와 속도감,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이를 마주했던 화가의 몸짓이 담겨있다. 그림에는 크게
혹은 작게 뒤로 물러나거나 몸을 잔뜩 웅크린 화가의 몸이 그려낸 시간의 층위가 담겨있고,
춤을 추듯 재빠르게 획을 그려내거나, 수행하듯 자신의 몸짓을 반복하는 화가의 존재가 새겨
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시간과 몸짓은 총체적인 서사가 부여된 후 비로소 그림으로
완결된다.
정희민의 그림은 디지털 구현을 시작점으로 삼는 과정의 결과물이다. 스크린 안에서 프로그
램을 통해 이미지를 구현하고, 이를 스크린 밖으로 꺼내어 캔버스에 옮기는 것은, 디지털상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공감각적 상태를 재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디지털 툴로 가공되어
시간과 서사를 상실한 이미지들은 다시금 작가의 몸을 빌려 물리적으로 구현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그림에 개입하는 작가의 신체를 다변화하고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상업 인쇄
기술인 실크 스크린 기법을 통해 기계와 자신의 신체를 동기화하여 작업적 욕구를 충족한
앤디 워홀이 당시 제작 방식의 한계를 벗어나게 했던 전략과 수단의 변모를 꾀한 것처럼, 정
희민은 자신의 신체를 스크린 내부로 편입시키고 동기화함으로써 보다 확장되고 경계가 없
는 화면의 무한성을 획득하였다. 문제는 동기화되고 렌더링이 끝난 이미지를 다시 스크린 밖
으로 꺼내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그는 적극적으로 신체를 활용한다.
2016년 그의 첫 개인전 <어제의 파랑>과 금호 미술관에서 선보였던 <UTC-7:00 JUN 오후
세 시의 테이블>(2018)은 그가 직면한 회화의 재현 문제와 동시대 창작 환경의 대립적 상황
과 고민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가 작성한 회화에 관한 노트를 다시 그림에 재현하고 충돌시
키거나, 가상 현실의 상태를 현실로 소환하여 비현실적인 상황을 물리적 공간에 배치함으로
써 이때 전시장은 일시적인 재현의 장으로 치환되고 혼합 현실의 상태로 존재한다. 이후 그
는 그림에 두께와 요철을 부여하고 코팅하거나 덧바르는 후가공의 과정을 적극적으로 드러
냈다. 이는 작가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촉각’이 결핍된 상태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상에 관
한 현실의 반증으로 디지털 이미지를 재현한 표면에 작가의 적극적인 신체적 개입을 통해
리얼타임의 생경함과 현실감을 부여하고자 하는 그의 제스쳐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브>(삼육빌딩, 2018)와 <2019 젊은 모색: 액체, 유리, 바다>(국립현대미술관, 2019)에
서 작가는 전시장 벽면을 꽉 채우고, 캔버스 뒷면의 존재를 지웠다. 벽이 없는, 지지체가 없
는 장면 앞에 마주했을 때 우리는 회화의 감상보다 장면으로 편입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현장에서 완성된다. 어디에서 끝을 맺고 어디까지 캔버스에 담을
것인지, 작가는 캔버스의 사이즈를 정하고, 이미지의 크기와 형태를 결정함에 따라 기존에 구
축한 스크린 내부의 가상 세계는 줌인 되거나 줌아웃 된다. 데이터의 집합체이자 가상 환경
에서 지워지고, 편집되고, 덮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그의 작업 과정은 그래서 더욱 작가의
선택과 결정, 그리고 최종적으로 종결된 상태가 놓이는 전시장의 환경이 모두 고려되었을 때
완결의 서사를 얻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스튜디오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핸드폰을 통해 데이터 파일 혹은 인쇄물의 이미지로 그림을 접한다. 그래서 종종 그
림의 옆면, 또는 벽면과 캔버스 사이의 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인스타그램이나 출
판물로 이미지를 접하는 경험이 반복되고 일상화되면서 크롭된 이미지로서의 작품과 물리적
인 존재로서의 캔버스 사이의 간극은 더욱 커졌다. 주광색 조명을 쓸 건지, 전구색 혹은 주백
색 조명을 쓰는지에 따라 전시장에서 마주하는 그림은 다른 의미와 이미지로 전달되기도 하
며, 흰 벽에 걸리는지, 전시장 동선에 따라 어떤 장면에서 마주하는지에 따른 감상 조건의 차
이는 관람자로 하여금 각기 다른 감상의 결과를 초래한다.
그의 그림은 무겁다. 실제로 정희민의 그림을 전시장에서 본 사람이라면 캔버스와 프레임의
묵직함을 인지 했을 것이다. 이러한 두께와 존재감은 그가 디지털 이미지 안에서 수집하고
선택하여 현실로 옮겨오는 과정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
다. 납작하고 열화된 이미지들이 스크린 밖으로 꺼내지는 과정을 거쳐 캔버스에 재현될 때
작가는 현실의 무게와 존재를 드러내고자 촉감을 더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의 이미지들은 아
크릴 조각, 캔버스, 스크린 그리고 책에 안착하기도 한다. 그의 가공 세계는 이렇듯 부유하다
안착하는 매체에 따라 그 깊이와 무게를 달리한다. 결국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가늠해 보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사색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이해한다는 것을 그
래서 어렵지만 분명 가치가 있는 일이다.